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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굳이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드는가?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던 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창조와 진화에 관한 논쟁에서부터 였다.
    중학교 2학년 수업 시간에 진화론이 잠깐 나왔는데
    친구와의 대화 중 내가 진화가 아닌 창조되었다고 하자 한 친구가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해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그때 난 반박할 어떠한 논리적인 근거도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하니까
    진화론 과학자들의 책도 샀다.
    한 10권 정도는 봤던 것 같다.

    결론은 나는 지금도 창조론을 믿는다.
    종 분화 정도의 변화와 진화는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고 현재에도 우리가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종 수준을 뛰어넘는 큰 진화가 돌연변이를 통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반 창조론 진영의 선봉장이라 할 수 있는 도킨스의 책들을 읽어보면 창조론에 대한 그의 주된 공격은 이런 식이다.
    창조론에서는 고도로 아름답고 체계적인 세상을 창조한 최고의 지성 (신) 을 가정하는데 그럼 그 신은 어디서 왔나?
    그 신을 만든 신은 더 위대해야 하고, 그 신을 만든 신을 만든 신은 더 위대해야 하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헛소리 하지 말라 이런 식이다.
    도킨스의 책이 두껍지만 실제 읽어보면 결국 핵심은 딱 이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런 논쟁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
    그럼 (예를 들어) 빅뱅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최초의 원시적인 물질과 에너지들은 대체 어디서 왔나?
    그 원시 물질은 또 어떻게 생겼고, 그 원시 물질을 만든 원시 물질의 원시 물질은 또 어디서부터 왔나?
    이것도 어차피 끝없는 논쟁이다.

    최초의 존재가 아주 원시적인 물질이든 아니면 최고의 지성을 가진 완벽한 존재이든
    뭔가 최초의 시작점은 그냥 원래 있었다고 가정 한 후 들어가야 하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과학자들이 보기에는 완벽한 존재를 가정하는 것 보다는 원시적인 물질을 가정하고 시작하는게 더 논리적으로 보이겠지만
    왜 꼭 그래야 하나?
    어차피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어떤 존재가 생길 수는 없다.
    무에서 원시 물질이 생기는 것은 무에서 하나님이 생기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하다.

    내가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의 책 10권을 읽고 이에 대한 논쟁을 때려친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일 뿐 증명 할 수 없다.
    진화의 더 좋은 증거가 나온다 해도
    그것도 사실 보는 사람의 가치가 섞여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나와 같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믿는 편견에서 세상을 바라보듯이
    진화론자들은 신의 존재는 인정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 있다는 고집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난 어려서부터 공룡 그림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과학자들이 대단하다 해도 저런 돌판에 눌린 허접하게 생긴 뼈다귀 몇 개를 가지고
    완벽한 공룡 그림을 복원해 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에는 나오는 최신 티라노 복원도는 영화 쥬라기 공원에 나오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다.
    진화의 증거라는 것을 찾아보면 티라노 복원도보다 훨씬 더 허접하고 조잡스런 것들 뿐이다.
    과학적으로 명확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진화론자들을 이해 못하는 것 만큼 창조 과학자들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젊은 지구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적 설계론은 또 왠 죽도 밥도 아닌 논리인가?
    진화론 만큼이나 뜬금없고 당황스럽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차피 인간의 지적 능력을 완전히 뛰어넘고
    과학의 한계와 차원을 완전히 초월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고 그 근거로 젊은 지구 따위를 논쟁할 필요가 뭐가 있는 걸까?
    천지창조의 하루가 지금과 같은 24시간인지 아닌지 그걸 왜 논쟁하고 있을까?
    전지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후, 결국 더 전지전능하다고 믿고 싶은(?) 자신의 뇌 속에 하나님을 구겨 넣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논쟁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진정한 전도가 성공했던 시절은 기독교가 실제로 사랑을 실천했을 때 뿐이었다.
    진화론자와 과학적 논쟁을 해서 이기면 하나님 믿는 이가 생길까?
    절대 그럴리 없다.
    논리로는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다.
    싸워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은 왜 최고의 석학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왜 그 뛰어난 능력으로 창조의 증거를 사람들 앞에서 직접 보여주지 않으셨을까?
    왜 짧은 공생애를 창조를 재현해 보여주는 위대한 일을 하는 대신
    고작(?) 창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보냈을까?

    젊은 지구 논쟁...
    사람 부끄럽게 제발 이런 것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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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이 있어, 이건 몰랐지? 이런 패턴의 메세지에 속지 말자

    내가 신앙 생활을 하며 다양한 메세지를 듣고 글을 읽으며 느낀 것이 있어서 적는다.
    자칫하면 속기 쉬운,
    "비밀이 있어, 이건 몰랐지? 어때 몰랐으면 큰일날 뻔 했지?"
    이런 패턴의 메세지이다.

    이런 패턴의 메세지는 대부분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으니
    아무 생각없이 듣다가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일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1.
    모 선교사님이 성령 세미나를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기 사역에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장로들은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는 말이 있기에
    진짜 기름을 바르고 기도도 해보았는데 그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류의 설교는 대부분 서론이 길고 흥미로워 대단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대체 비결이 뭐였을까?? 듣는 이들의 귀가 솔깃해짐)

    그런데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그 비결은 바로,
    성경에 보면 간구한게 아니고 명령을 했단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태복음 9장 6절) 했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하나님 제발 이 사람이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3장 6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명령’했더니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설교였다.

    참으로 솔깃한 설교가 아닌가?
    "오호라~ 그런 비밀이 있었구나, 나는 몰랐네. 그래서 우리 어머니 병이 안 고쳐졌나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란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1-33절)

    이런 하나님께서 병든 우리를 보시고
    "아유... 이 녀석 고쳐주고 싶은데 너 왜 비밀을 모르니.
    '병 고쳐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병아 물러가라.' 이렇게 기도해야 내가 고쳐주지.
    성경 좀 꼼꼼히 읽어봐... 정말 안타깝네 고쳐주고 싶은데..."
    이러면서 안 고쳐주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2.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되는 솔깃한 말세의 비밀은 바로 666 바코드 설이다.

    그 근거는 다음 구절이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라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요한계시록 13장 16-18절)

    앞으로 손목이나 이마에 칩을 심어서 이것으로 100% 결재하는 시대가 오는데
    이게 사탄의 표이며 이거 받으면 지옥간다 이런 식의 스토리이다.

    참으로 공포스럽고 "이거 몰랐으면 큰일날 뻔 했네" 하는 느낌이 드는 설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 역시 기독교인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본질을 흐리는 논리이다.

    이런 스토리를 생각해보자.
    시골에 평생 신실하게 하나님 말씀따라 살던 할머니가 한 분 계신데
    어느날  동사무소에서 찾아와
    "할머니 내년 부터는 손목에 이 칩을 안 넣으시면 마트에서 물건 못사세요" 해서
    할머니가 사인하고 칩을 받았더니 왠걸 지옥으로 떨어졌다.
    하나님은 이걸보고 안타까워하신다.
    "아유~ 왜 성경 꼼꼼히 안 읽어봤어.
    내가 요한계시록 13장에 잘 숨겨놨는데 찾았어야지.
    안타깝지만 할 수 없다 그냥 지옥 가야지... 쯧쯧쯧"

    이게 말이 되는가?
    뭔놈의 전자칩이 예수의 보혈보다도 힘이 세단 말인가?

    그런데 과장이 아니고 정말로 바코드 설교를 들으면 저런 위기감이 든다.
    "아~ 내가 저걸 몰랐네. 큰일 날뻔 했다.
    우리 엄마한테도 알려줘야지.
    이걸 모르고 순진하게 전자칩 받으셔서 지옥 떨어지면 어쩌나 아이고..."

    위의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자가 경제 활동에 제약을 받는 때가 온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도 모르게 전자칩 하나 받았는데 지옥가는 그런 스토리가 아니고
    신앙의 본질과 관계되어 우리에게 일어날 사건이다.
    달리 말하면 늘 신실하게 신앙생활하고 믿음 지키며 살면
    바코드의 비밀 따위는 모르고 있어도 미래의 그 일은 피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3.
    요즘 나오는 노란 리본 달지 말라는 주장도 다 이런 류이다.
    '겨울왕국 속에 숨겨진 동성애 코드' 이런 주장,
    소녀시대 노래를 거꾸로 틀면 성관계 가사가 나온다는 둥,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의 상징이 어디 화면 귀퉁이에 숨어 있고 어쩌고 저쩌고...
    이런 것은 하도 많고 꾸준히 제기되기에 다 언급할 수도 없다.

    "몰랐지? 이게 사탄의 역사야.
    니가 모르게 겨울 왕국 보는 동안 무의식속에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는거지."
    정말 솔깃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설교인 것 같지만 속지 말아야 한다.

    답답한 것은 순진한(?) 그리스도 인들이 이런 것을 듣고
    "그것도 모르고 겨울 왕국 본 것 회개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노란 리본 카톡에 단 것 회개합니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와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신앙적으로 제대로 살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내 탐욕을 위해서만 사는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지 못했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회개할 일이지
    뉴스, 신문에 공공연히 들어난 죄악도 회개 못하고 있는 교회가
    뭔놈의 카톡 노란 리본 가지고 회개를 한단 말인가.
    참 답답한 노릇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신앙 생활을 더 철저히 오염될 여지가 없이 정결하게 하면 더 좋은 것 아닌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 노란 리본으로 인해 우리의 영이 오염되지 않는다.
    감사하고 제사음식 먹으면 아무 문제없듯이
    안타깝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노란 리본을 달면 그만이다.

    둘째, 이런 주장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흐려 엉뚱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든다.
    본질적인 신앙의 열매보다 사소한 상징에 목숨거는 자신이 남들보다 더 정결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디모데후서 3장 2절부터)
    함께 단결해 말세의 이런 근본적인 문제와 싸워야 할 성도들이
    전자주민증이나 생체인식 결제시스템을 가지고 이게 666이다 이건 666이 아니다 박터지게 싸우면서 분열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셋째, 이런 주장들은 세상 앞에 기독교의 꼴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주 원인이 된다.

    천국은 분명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마태복음 13장 44절)
    하지만 그것이 성경 723페이지 5번째 줄에 숨겨진 비밀 코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부디 저런 설교나 글에 넘어가 인생과 신앙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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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셉과 다니엘을 통해 진정으로 배워야 할 점

    기독교가 기복 신앙으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오용되는 성경 말씀은 요셉과 다니엘 이야기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지겨울만큼 많이 듣는다.
    "청년들이여 요셉처럼 큰 꿈을 꾸고 성실히 자기 주어진 일 최선을 다해 하고 자기 개발해서 의사되고 검사되고 큰 사업가되고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이런 메세지가 잘못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요셉은 스스로 큰 꿈을 꾼 적이 없다. 이집트의 총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져본 적도 없다. 그의 꿈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일 뿐 자신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조차 몰랐다.

    둘째, 정말 요셉이 되고 싶다면 결과만 볼 것이 아니고 그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요셉의 삶은 온갖 고난과 비참함의 연속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항상 내가 요셉과 같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하지만 요셉과 같이 된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 타국에 종으로 팔려가고 누명쓰고 감옥살이에 죽을 위험에 온갖 비참한 고생을 다 해야 한다는 의미인줄은 생각 못하셨던 모양이다.

    셋째, 요셉이나 다니엘이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거나 남들보다 더 큰 꿈을 꿔서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해주셨다는 말이 성경에 전혀 없다. 그저 성경에 있는 그대로 보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꿈을 주셨고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하는 일을 잘 되게 해주셨다. 그들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왕의 꿈을 해몽한 사건인데 이것은 그들이 공부나 연구를 열심히 해서 해낸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답을 일방적으로 가르쳐주신 것이다.

    넷째, 그렇다면 요셉이나 다니엘이 스스로 잘한 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를 지켜 하나님 앞에 흠 없이 깨끗한 그릇이 되고자 한 것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수없이 유혹할 때에도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과 온갖 유혹에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를 택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의 핵심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일관되고 분명하다. 디모데후서 2장에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인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것이라 하였다. 그릇에는 금그릇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하게 쓰는 나무그릇 질그릇도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금그릇이 될지 질그릇이 될지는 그릇이 노력해서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릇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정하실 일이다. 다만 금그릇이라도 더러우면 버리시고 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귀하게 쓰신다.

    기복주의, 성공지상주의 요셉 설교는 정결함보다는 큰 꿈과 큰 성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문제가 있다. 금그릇 은그릇이 되는 꿈을 꾸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메세지라기 보다는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잘난 이들이 전하는 자기개발과 성공에 관한 흔한 메세지를 포장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공부를 못하거나 능력이 부족하고 선천적으로 큰 꿈을 가지는 성향이 아닌 사람들을 신앙의 낙오자 내지는 인생의 루져로 만들어 버린다. 반면 능력있고 야심있는 사람들에게는 안심하고 더 큰 야심과 성공을 추구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준다.

    요셉과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큰 꿈을 가지라거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거나 총리와 같이 높은 자리에 올라 크게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 아니다. 요셉과 다니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참 교훈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의지하며 자신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지키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고 그의 능력과 상관없이 귀히 쓰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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